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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이해하면 여러가지가 보인다. 예컨대 1998년 봄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상암동 월드컵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반대하면서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판국에 정부가 흥청망청 돈을 써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이건 현명한 개인들이 저지르는 저축이라는 '사회적 악덕'을 상쇄하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지출을 늘여야 할 국가더러, 민간가계와 똑같이 행동함으로써 그 악덕을 부채질하라고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옥으로 간느 길은 때로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
또 하나의 예가 국산품 애용이다. 사실 국산품 애용이라는 구호는 국내기업이 품질이 변변찮은 상품을 비싼 값에 팔아 배를 불리는 데 매우 유용한 이데올로기다. 제한된 소득으로 최대의 만족을 추구하는 경제인이 더 싸고 품질 좋은 수입품을 외면한다는 건 불합리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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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정부가 손대지 말고 신문업계의 '자율규제'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220여년 전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 제1편 제10장에 남겨두었던 유명한 말씀을 한번 되새김질 해 볼 필요가 있겠다.
'동업자들은 즐겁게 놀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서로 만나는 경우가 드물지만, 만나기만 하면 대화는 언제나 국민대중에 대한 음모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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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결론을 짓자.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국가의 보이는 주먹이 이런 문제들을 말끔하게 해결하리라는 기대는 근거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국가는 시장의 실패가 야기하는 문제를, 운이 아주 좋은 경우에도 어느정도 완화할 수 있을 따름이다. 국가의 잘못된 개입이 시장의 실패를 더 악화시키는 경우도 물론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경제학이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다. 지난 세기 전환기의 가장 뛰어난 경제학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폴 크루그먼이 한 말이니 독자들께서는 믿으셔도 된다. 그는 '경제학의 향연' 서론에서 이런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경제학이 원시과학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의학과 비슷하다. 당시 의학교수들은 인간의 신체기관과 작용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축적했고, 이를 토대로 질병을 예방하는데 매우 쓸모 있는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병에 걸린 환자는 제대로 치료할 줄 몰랐다. 경제학이 이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크게 다르지도 않다. 경제학자는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단히 많이 알고 있지만... 치료할 수 없는게 많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 경제성장의 마법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을 회복하는 법도 모른다.
크루그먼의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중에 국가의 경제정책적 권능과 관련하여 비교적 분명한 메세지는 이런 것이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만하면 온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빈부격차와 불화을 비롯한 온갖 경제적인 악을 제거할 것처럼 큰소리치는 정치가를 믿지 말라. 무식한 돌팔이가 아니면 말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 틀림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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